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생애 (문단 편집) ==== '''구르고'''(1783~1852), 1818년 까지 ==== 나폴레옹처럼 포병 출신으로 백일천하 당시 나폴레옹의 부관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으로는 자신이 최고라고 나름 자부하던 그는 본디 유배 동행자로서 나폴레옹이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구르고가 생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그를 합류시키게 되었는데, 만약 구르고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충복 사바리 장군[* 푸셰의 후임으로 치안장관을 역임했었던 인물로, 최고의 나폴레옹 숭배자였다.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와 더불어 충성심은 최고 수준. 나폴레옹이 프랑스와 마지막 작별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하며 그와의 이별을 눈물로서 슬퍼한다. '당신을 죽이게 되어 유감이오. 하지만 황제께서 그걸 원하시오'라는 나름 유명한 말의 주인공.]이 대신 합류했을 것이고 나폴레옹의 유배생활은 덜 고달파졌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라스 카즈를 몽톨롱과 함께 극도로 시기하였는데, 충성스럽긴 하지만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며 총애경쟁을 벌이는 구르고 때문에 나폴레옹은 피곤해한다. 한 여자를 두고 여러 남자가 싸우는 듯한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나폴레옹은 툭하면 구르고와 티격태격 충돌하며 점점 그에게 싸늘해졌는데, 몽톨롱과의 친분마저 파탄난 구르고가 몽톨롱에게 결투를 신청한 사건이 벌어지자 나폴레옹의 관심에서 더욱 더 멀어진다. 당시 기록(구르고의 일기)에 나오는 티격태격하는 대화들을 종합해 보자면 대략 이렇다. >'''나폴레옹''': 구르고, 오늘은 인상이 또 왜 그래? >'''구르고''': 폐하. 전 제가 더 이상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그렇지 않아. 몽톨롱 부부와 잘 지내는 게 좋을 거야. 넌 항상 내 성질을 건드리고 있어. 여기 따라온 이상 날 기쁘게 하라고. >'''구르고''': 그럴 순 없습니다. 그는 절 모욕했습니다. 폐하께서 저보다 몽톨롱을 더 가까이 하시는 걸 참을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 내가 누굴 가까이 하든 네가 뭔 상관이야? 나라는 바위와 충돌해 봐야 넌 깨질 뿐이야. 넌 날 모욕하고 내 인생을 더 괴롭게 하고 있어. 몽톨롱이 너보다 더 나아! >'''구르고''': 폐하께서 절 이토록 천대하시다니 너무나 슬픕니다. >'''나폴레옹''':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구르고''': 이런 모욕을 당하느니 제가 여길 떠날 수 있게 해 주십쇼. 뒤끝이 심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구르고와 다툴 때 마다 이후 나름 좋은 말을 해 주는 등 그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나 결국 구르고는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818년 2월, 나폴레옹과 작별한 그는 한동안 섬 저지대에 머물게 되는데 그 이유는 베르트랑에게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서였다. 3월이 되자 베르트랑은 돈을 지불했고 구르고는 섬을 떠난다. 섬을 떠난 이후의 라스 카즈가 회상록 출판 등으로 나폴레옹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 반면, 구르고는 그러지 못했다. 세인트헬레나 체류 당시 그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곳의 생활을 굉장히 미화해 놓았다. 가족이 자신을 걱정할까 우려해 한 일이었지만 이것이 나폴레옹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나폴레옹에 대한 처분이 가혹하다는 일부 비판에 직면했던 영국은 구르고의 이 편지를 이용해 정당화에 성공하고 나폴레옹의 유배조건을 더욱 옥죄게 되는데, 총독 허드슨 로가 본국의 의향을 충실히 이행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나폴레옹의 뒤통수를 친 셈이다. 라스 카즈가 떠난 후 나폴레옹이 구술하는 회고록 기술을 도맡아 했었다. 비록 나폴레옹과 티격태격 했고 라스 카즈의 언변과 학식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나름 나폴레옹의 말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는 등 그래도 그의 역할이 적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구르고마저 섬을 떠나자 나폴레옹의 말동무가 될만한 사람은 사실상 없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더욱 더 고독해진다. 이후 1819년 7월에 몽톨롱의 부인[* 알빈 몽톨롱(1779~1848). 세인트헬레나 시절 나폴레옹의 정부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가 세인트헬레나에서 낳은 딸인 엘렌(1816~1910)을 나폴레옹의 딸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마저 섬을 떠나자 이제 희망은커녕 온통 절망과 고독, 먹구름 그리고 앙톰마르쉬 밖에 없는 유배생활 후반기가 펼쳐지며 그때부터 건강이 빠르게 악화된다. 아래 '독살설' 문단에 나오는 시기가 이때부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